2019. 11.

크리틱-칼의 책 선물, 서평으로 돌아오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말하고 싶은 것들에 관하여

노파심과 미안함을 한가득 안고 글을 시작하기로 한다. 짧은 소개 글에 속아 학술적인 논의를 기대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이 글은 그리 (강단)철학적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글은 (강단)철학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인 목적을 갖고 글을 읽으러 온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지금 읽고 있는 이 창을 내려놓고 다음과 같은 2차 문헌들을 참고하기를 권한다. G. E. M. Anscombe의 An Introduction to Wittgenstein’s Tractatus나, Hans-Johann Glock의 A Wittgenstein Dictionary, Max Black의 A Companion to Wittgenstein’s Tractatus, 혹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의 철학문헌 정보에서 『논리철학논고』 항목 등을 읽는 게, 분명 이 글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술적인 논의 대신, 이 글에서 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하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인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하 『논고』)[1]의 특정 구절을 단초 삼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많은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막연한 소회를 늘어놓을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영미-분석 미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와 (대중음악) 비평과 관련하여 찾고자 하는 지점에 대한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저작인 『논고』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은 머리말에서 등장하고 책의 마지막에서 다시 제시되는 다음의 문장이다.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15)와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17)라는 『논고』의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동시에 가장 많은 오독을 낳는 구절이기도 하다. 아마 ‘네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입 다물라.’는 함축을 갖는 문장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말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우리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기에 그것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언표될 수 없는 것을 언표하는 사람은 분명 헛소리를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사기꾼일 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에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 가능한 것들 혹은 언표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를 규명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몫이다. 따라서 역으로 말하자면, 자연과학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영역은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예술 비평이(특히 음악 비평이) 처하게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한다. 우리의 경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예술을, 예술 비평은 일상 언어를 통해 어떻게든 경험의 영역 내로 포섭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는 것(예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예술 비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유는 예술 비평에 대한 회의와 허무만을 남길 뿐이다.

여기에는 두 방식의 대응이 가능하다.

  1. 예술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를 검토하고 사실 예술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증하는 것과

  2. 예술에 관해 말하는 예술 비평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더라도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것

이다.

전자는 내가 영미-분석 미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게 된 이유이고, 후자는 내가 비평이라는 영역에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이다.

우선, 1)은 영미-분석 미학의 대표적인 목표 중 하나이다. 영미-분석 미학은 얼핏 보면 신비로운 무언가인 듯한 예술을, 최대한 경험적 영역 내에서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언어 혹은 형식논리로 환언시킨 뒤, 예술을 둘러싼 여러 문제의 객관적인 답을 찾고자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강박적으로 천착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처럼 보이던 대상에 관해 조금 딱딱하더라도 엄밀하고 명료하게 논하고자 분투하는 작업은, 분명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멋지고 값진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